#우리는 ‘일’ 하고 있는가?
얼마 전 큐어버스의 조성진 대표로부터 “저 MBC 뉴스 나와요~”라는 짤막한 문자를 받았습니다. 지난 달에 안젤리니파마(Angelini Pharma)와 체결했던 ‘CV-01’ 기술수출(L/O) 계약 건이 공중파를 탄다는 소식이었죠. 방송국도 신약개발 소식에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니,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뉴스 영상은 기술수출이란 사건보다도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실험실 출신의 조성진 대표와 박기덕 연구소장이 맺은 30년의 우정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결혼식 축가까지 불러줬던 동료와 ‘끝내주는 뇌질환 신약을 만들겠다’는 열망을 함께 불사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큐어버스의 성과가 두 사람의 우정 덕이었느냐’면, 핵심은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듯합니다. 시리즈 A 투자단계에 있는 이 기업의 총원은 7명에 불과합니다. 여기 합류하기 전 모두 조 대표와 최소 4~5년의 인연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일당백’을 다시 추려낸 것이 지금의 큐어버스입니다.
조 대표의 인사전략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의견은 심플합니다. ‘회사라는 구색을 갖추는 데 신경쓰지 않았다’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 회사라는 개념을 만드는 것이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큐어버스의 7인은 그저 혁신 뇌질환 신약 개발이란 일을 하고 싶어서 한 공간에 모여 있을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일’이란 행위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했습니다. 일은 목적과 노동의 결합입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일련의 작업을 거치는 행위를 아울러 일이라 부릅니다. 우리 회사, 우리 팀을 돌아봅시다. 우린 함께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나요? 매출 초과달성, 예산안 통과, 00년도 상장 같은 ‘목표’가 아닌, 우리 회사가 아니라면 탄생시킬 수 없는 본연의 가치, 즉 ‘목적’을 위해 노동하고 있는 걸까요?
위대한 바이오텍으로 가는 첫 마일스톤, 좋은 바이오텍으로 가는 첫 걸음은 진정으로 ‘일’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경영진과 실무진들이 함께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지, 하루하루 행하는 노동이 그 목적에 부합하는 것인지, 이 모두를 합친 ‘우리의 일’에 모두가 진심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일을 하기 위해 꼭 걱정하고 고뇌해야 합니다.
#K-버텍스, K-리제네론은 없다
바이오스펙테이터 김성민 기자의 책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사이언스에 미쳐있는 바이오텍’의 극치로서 버텍스와 리제네론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창립부터 첫 흑자전환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을 털어넣었습니다. 그렇게 각각 ‘칼리데코(KALYDECO)’ㆍ’아일리아(EYLEA)’라는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면서, ‘신약만으로 먹고사는 바이오텍’이란 사업모델을 구축하는 데 이릅니다.
이들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지속 가능한 바이오텍의 전제조건은 ‘사이언스에 미쳐있는 것’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조건일 뿐 전략이라 부르기 힘듭니다. 다시 말해 강력한 사이언스는 바이오텍이 응당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자질이고, 사업의 성공을 일구는 방법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버텍스ㆍ리제네론은 우리의 롤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세운 조건은 따라할 수 있어도, 이들이 활용한 전략은 따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바이오텍이 첫 흑자전환까지 활용한 전략은 ‘거대하고 유연한 미국 투자시장의 힘으로 버티기’였습니다. 하지만 한국 투자시장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 충분한 규모와 유연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사이언스라는 자질만을 가지고 시장에 투신하는 건 우리가 쓸 수 있는 전략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가야 합니다. K-버텍스, K-리제네론을 바라기보단, 우리 한국의 바이오텍에게 가장 적합한 전략을 찾아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전략은 어떻게 입안해야 하는 걸까요? 아래 섹션에서 마저 이야기해 봅니다.
#라이선싱은 정말로 ‘운칠기삼’인가?
버텍스ㆍ리제네론과 달리 한국 바이오텍은 투자시장의 힘을 빌려 독자 신약을 출시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연속적인 라이선싱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고, 그 재원으로 독자 개발을 시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라이선싱이 ‘운칠기삼’의 영역에 있느냐는 겁니다. 의료 미충족 수요나 시장 미충족 수요에 맞는 후보물질을 개발해도, 빅파마의 미충족 수요가 이와 일치할지는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단 개발해두고 빅파마가 손을 내밀어주는 행운을 기대하는 건 전략적이지 않습니다. 연속적인 라이선싱을 하려면 행운의 영역을 크게 줄이고, 필연의 영역을 그만큼 늘리는 ‘운삼기칠’이 필요합니다.
First in class 신약에서 ‘운삼기칠’ 라이선싱을 도모하는 법을 작게나마 논해 보겠습니다. 그간 취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First in class 개발의 경우 학술적인 동향 파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네이처(Nature), 사이언스(Science) 등 주요 학술지에서 빅 페이퍼(Big paper)가 주도하는 학계 여론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 년 후에 빅파마의 First in class 기술도입 수요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 때 중요한 건, 학계 여론이 등장하기 전에, 예컨대 ‘타깃 X가 T세포 면역반응에 관여한다’라는 빅 페이퍼가 등장하기 전에, 타깃 X에 대한 히트(Hit)물질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평시에 자체적인 타깃 발굴을 일상적으로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만약 타깃 X에 대한 히트 물질이 미리 준비돼 있다면, 학계 여론이 타깃 X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것을 감지한 순간에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쟁자들과 시간차를 최대한 벌려둔다면, 타깃 X에 대해 빅파마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가장 개발이 많이 진행된 라이선싱 후보물질로 매력을 뽐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널리 알려진 바와 다르게 First in class 약물은 비임상 단계에서 조기 라이선싱되는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항암제 섹터에선 임상 데이터가 없으면 라이선싱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중론이었으나, 리가켐바이오의 ‘LCB97’ㆍ넥스아이의 ‘NXI-101’ㆍ지놈앤컴퍼니의 ‘GENA-111’는 모두 비임상 단계에서 라이선싱된 항암제입니다. 개발 중 현금 유출을 최소화해야 하는 한국 바이오텍의 사정 상 조기 라이선싱은 반 필수적이므로, 역설적이게도 First in class에 도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전략일지 모릅니다.